[토요일에 만난 사람]"佛畵에 빠져 100억 쾌척까지.. 인연이란 게 참 묘하지"(동아일보)_2
작성자 최고관리자

만봉은 1916년 6세에 김예운 스님 문하에 들어가 불화와 인연을 맺어 1926년 금어(金魚·불교에서 불화의 최고 경지에 이른 스님에게 주는 칭호)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까지 됐다. 만봉의 붓끝에 실어진 작품들은 지금도 남북한 사찰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북한 금강산의 표훈사와 유점사, 장안사, 마연사의 단청을 그렸다. 그리고 서울 봉원사와 도봉산 도선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등 주요 사찰과 경복궁 경회루를 비롯해 종로 보신각 숭례문(남대문) 남한산성 등 문화재 단청도 만봉이 그렸다.

최 관장은 “불자들에게 만봉 스님 얘기를 하자 ‘만봉 스님이 어떤 분인데…’ ‘그분 말씀은 부처님 말씀인데…’라며 부탁을 거절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봉원사를 찾았다”고 말했다.

당시 명부전을 지으려면 약 7000만 원이 필요했다. 만봉은 탱화를 내놓으며 “그림 하나당 350만 원을 받으면 된다”고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불교에 관심이 많고 사업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한 이 이사장을 찾았다. 이 이사장이 “그림 하나에 얼마인가요”라고 하자 최 관장은 자기도 모르게 “600만 원입니다”라고 했단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부처님이 시킨 듯 나온 말이란다. 어쨌든 이 이사장은 그림 5개를 사며 3000만 원을 그 자리에서 줬다. 최 관장은 “이 이사장님이 그림을 사 준 뒤부터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 당시 총 1억4000여만 원어치를 팔았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부처님을 보면 꼭 어머니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1965년 ㈜신원휄트란 회사를 만들면서도 회사와 공장, 집에 석불을 세웠다. 힘들 때 어머니 얼굴을 보면 힘이 나듯 부처님 얼굴을 보면 힘이 넘쳤다. 탱화도 그에게는 힘을 주는 원천이었다. 1960, 70년대는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못살았다. 사업하기도 힘들었다. 그때마다 부처님을 보면서 투지를 불태웠다고 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른다. 우리같이 70세 넘은 사람들에게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먹고살게 해 준 분’이다. 한창 사업할 때 박 대통령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울컥한 적이 있다. 조그만 사업체 하나 운영하기도 힘든데 못사는 국가를 잘살게 하려고 고속도로를 뚫고 제철회사를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이 이사장은 신문팔이로 고학을 하며 자수성가했다. 형편이 힘들어 일찍 학업을 포기하고 중절모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등장에 공장을 그만두고 국내 최초로 펠트(Felt)를 만드는 회사를 창립하게 됐다. 1961년 당시까지만 해도 전 세계 남자들이 중절모를 쓰고 다녔다. 그런데 케네디 대통령이 중절모를 벗고 머리를 바짝 깎은 모습으로 나타나 여심(女心)을 사로잡고 백악관에 입성하자 남자들이 모자를 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공장에서 색다른 섬유를 연구하던 이 이사장은 모자도 만들고 건축할 때도 쓰고 피아노 재료로도 쓸 수 있는 펠트 제작에 나선 것이다. 펠트는 양모나 인조 섬유를 습기와 열을 가해 압축한 천으로 보온성이나 충격을 완화하는 성질이 우수하다.

이 이사장은 “일본에서 기술을 들여와 더 좋게 만들어 되팔았다. 우리가 전자제품을 일본에서 들여와 더 좋게 만들어 돈을 벌었듯 그렇게 해서 회사를 키웠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2005년 제42회 무역의 날 500만 달러 수출의 탑 상패를 받기도 하는 등 대한민국 경제 성장에 힘을 보탰다.

최복숙 만봉불화박물관 관장이 만봉사 법당에서 불화박물관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영월=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이 이사장은 평소에도 장학금도 내놓고 기부도 많이 했다. 부처님 덕에 성공했다는 생각에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난 돈 벌면 절과 보육원, 양로원을 만들겠다고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최 관장을 통해 만봉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이사장과 만봉의 인연은 만봉이 97세(법랍 81세)로 열반한 2006년 5월 17일까지 이어졌다. 지방의 어려운 불자 돕기나 사찰 짓기 도움 전시회가 열릴 때면 이 이사장이 불화 구입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최 관장이 이 이사장을 불렀고 이 이사장이 불화에 꽃을 꽂아주면 팔리기 시작했단다. 이 이사장은 “만봉 스님은 주변머리가 없었다. 그림 그리는 방이 없어 판잣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림방을 하나 지어 줬다. 그러자 ‘이제야 제자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다’며 좋아하셨다. 너무 순수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이사장이 만봉에게 끌린 이유는 불화 때문만은 아니다. 평생 불화만 그리며 중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만봉의 삶이 존경스러워서다. 만봉은 늘 없는 사람에게 나눠 줬다. 거지가 찾아와도 괄시하는 법이 없었다. 함께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었다. 만봉은 통장도 없었다. 돈을 왜 은행에 쌓아 두느냐는 것이다. ‘어렵게 사는 불자가 많고 돈이 없어 절을 짓지 못하는데 왜 돈을 쌓아 두느냐’며 모두 내놓았단다. 전시회가 끝나면 모든 돈을 불자 돕기나 사찰 짓는 데 내놓고 돌아섰다. 명부전 관련 전시회 때 약 7000만 원이 남자 바로 전주지업사, 금은방 등 불화 재료상을 돌아다니며 외상값을 다 갚았단다. 모아둔 돈이 없었던 만봉은 늘 먼저 외상으로 쓰고 나중에 갚았다. 그때 남은 돈은 단 180만 원뿐이었다고.

만봉이 열반하자 남은 탱화를 어떻게 할지를 놓고 고민이 시작됐다. 기증하면 관리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았다. 불교미술을 계승 발전시키고 가급적 많은 불자가 만봉의 불화를 보고 평화를 느끼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불화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 이사장이 그동안 사 모은 탱화를 내놓으며 100억 원까지 쾌척한 이유다. 불자들의 헌금으로 지으려면 10년이 넘게 걸리니 빨리 짓기 위해 이 이사장이 거금을 투자한 것이다. 자제들은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는 “전혀 반대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부처님을 보고 자라 나눔에 익숙했다. ‘아버지가 번 돈은 아버지가 다 쓰고 가라’고 한다”며 웃었다.

박물관은 2008년 착공해 2013년 5월 개관했다. 만봉의 제자들이 박물관의 벽화와 단청을 다 했다. 이 이사장은 “불화박물관을 짓자고 했을 땐 작은 생각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정말 잘했다고 판단된다. 이 박물관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유산이 돼 불자들에게 깨달음을 주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요즘 주말에 많을 땐 100여 명이 박물관을 찾는다.

기자는 김준영 전 성균관대 총장(64)과의 인연으로 이 이사장을 만나게 됐다. 김 전 총장은 8년여 전 성균관대 최고경영자 과정을 다니던 이 이사장을 보고 “이렇게 나이 드신 분이 아직 공부를 하시나” 하며 유심히 보게 됐고 각종 기부 활동에 불화박물관을 짓는다는 소식까지 접했다. 김 전 총장은 “사회는 이런 분들이 많아야 발전한다. 더 많은 사람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며 아쉬워했다. 이 이사장의 불화 사랑 스토리가 인연이 돼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

영월=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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