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봉스님이 꽃 피운, 불교예술의 세계(오마이뉴스)
작성자 최고관리자

[오마이뉴스 이상기 기자]

만봉사와 만봉불화박물관

ⓒ 이상기

만봉불화박물관을 만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강원도 영월 땅에 있는 산꼬라데이길을 트레킹 하러 가기 전에는 그 이름을 듣도 보도 못 했기 때문이다. 예밀리에서 버스를 내렸는데, 첫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만봉사와 만봉불화박물관이다. 어! 저거 꼭 보고 가야겠는 걸. 그런데 만봉불화박물관이 이번 트레킹 코스의 가장 마지막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을 캐러 왔다가 다이아몬드를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다.

만봉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다. 겨울해가 짧아 산골짜기는 벌써 어스름하다. 눈이 하양게 쌓인 마당 너머로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난다. 전통적인 기와집 형식이지만 콘크리트로 지어 따뜻한 느낌이 부족하다. 만봉사와 불화박물관에 들어가려면 건물을 한 바퀴를 돌아 정문 쪽으로 가야 한다. 정문에 이르니 좌우에 만봉사(萬奉寺)와 만봉불화박물관(萬奉佛畵博物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런데 정문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정문 2층에는 범종각이 있다.

연등 너머 만봉사 대웅전

ⓒ 이상기

정문을 들어서니 좌우로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정문이 천왕문이 되는 것이다. 정문을 들어서니 넓은 공간이 있고, 그 앞으로 2층짜리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다. 좌우에는 불화전시실이 있다. 그러므로 만봉사와 불화박물관은 ㅁ자형의 건물로 되어 있다. 마당 위로는 연등이 빡빡하게 걸려 있다. 그래서 대웅전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나는 절보다는 불화에 관심이 많아 먼저 왼쪽 전시실로 들어간다.

만봉스님의 불화 이야기

만봉불화박물관은 2013년 5월 28일 영월군 김삿갓면 예밀리 8-1번지에 문을 열었다. 2008년 9월에 기공식을 했으니 5년 가까이 걸린 대역사였다. 신원불교재단 이용국 이사장의 지원을 받아 만봉불화박물관 최복숙 관장이 불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만봉불화박물관을 지은 이유는 만봉스님의 유업을 받들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용국 이사장은 말한다. 그럼 만봉스님이 어떤 분이길래 그의 유업을 받든다는 걸까?

만봉당자성대종사

ⓒ 이상기

그는 20세기 한국 불교의 위대한 화가였다. 불가에서는 불화의 최고 경지에 이른 스님을 금어(金魚)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만봉스님은 20세기 최고의 금어다. 1910년 서울에서 출생한 만봉스님은 1918 년 서울 봉원사에서 장수간 스님을 은사로 정식 출가했다. 이때 받은 법명이 자성(慈性)이다. 만봉은 나중에 받은 법호다. 그래서 이곳 박물관에 걸린 그의 초상화에는 만봉당자성대종사(萬奉堂慈性大宗師)라고 적혀 있다.

그는 처음에 다른 스님과 마찬가지로 경전공부, 선공부, 염불과 범패 공부 등을 했다. 그러다 1928년 당대 최고의 금어 김예운(金藝雲) 스님을 만나면서 불화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러한 인연을 통해 그는 자신의 근기가 불화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5년 쯤 공부한 만봉스님은 예운스님과 함께 단청시공에 참여한다. 1933년 금강산 표훈사 나한전 단청시공을 했고, 이듬해에는 유점사 단청시공을 했다. 그리고 1936년 10월 금어가 되었다.

불화작업을 하는 단청장 만봉스님

ⓒ 문화재청

금어가 된 후 그가 맡은 첫 일은 1938년의 조계사 일주문 단청이었다. 그 후 금강산 마하연, 서울 봉원사, 도봉산 천축사 등의 단청 시공과 불화 작업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양주 회암사, 광주의 남한산성, 경복궁 육각정과 경회루, 강릉 경포대 등의 단청을 맡아서 했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에는 거의 매년 큰 불사 및 문화재 보수작업에 참여했다. 만봉스님은 그러한 경력을 인정받아 197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이 되었다.

단청장은 목조건물 채색 일을 하는 장인을 말한다. 그러나 만봉스님이 단청만을 그린 건 아니다. 단청에서 시작해 불화까지 두루 잘 그리는 금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5년 불화장이 단청장에서 분리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가 되면서 불화장까지 겸하게 되었다. 만봉스님의 전시회는 1978년 일본에서 처음 열렸고, 1989년 12월에서 1990년 2월까지 덕수궁 석조전 전통공예관에서 '만봉 이치호 스님 단청전'이 대대적으로 열렸다.

6폭 병풍에 그린 관음도

ⓒ 이상기

당시 전시 작품은 탱화와 단청으로 나뉘어졌다. 여기서 그는 불화의 예술성, 다양성, 신비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단청의 아름다움, 화려함, 장엄함을 보여주었다. 만봉스님에게 불화 작업은 현세에 극락을 이루려는 구도의 길이었다. 스님의 불화 속에는 부처님의 삶이 있고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더 나가서는 부처님의 마음이 불화를 통해서 전해진다.

만봉스님은 2006년 9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화와 단청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렸다. 2004년에는 불국사 석굴암의 의뢰로 폭 2m, 높이 7m의 대형 괘불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봉원사 삼천불전 개금불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불교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 현세에서 극락세계를 표현하고, 조용히 서방정토로 떠난 영원한 금어였다.

만봉불화박물관이 만들어지게 된 인연

최복숙 관장이 구입한 1998년작 궁모란도

ⓒ 이상기

만봉불화박물관을 세운 최복숙 관장과 만봉스님의 인연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봉스님이 봉원사 명부전 불사를 진행하다가 중단한 상태에서, 최복숙 보살에게 자신의 불화전시회를 열어줄 것을 부탁하면서부터다. 이 전시회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봉원사 명부전은 지어졌고, 스님과 보살의 인연은 스님이 입적하는 1996년까지 25년간 계속되었다.

최복숙 관장은 그동안 만봉불화전승회를 발족시키고 수십 번의 전시회를 열면서 140여 점의 불화를 구입해 놓았다. 그리고 전시회 도록부터 불화 달력까지 만봉스님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수집했다. 최관장은 이들 불화를 한곳에 모아 전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만봉스님 입적 몇 해 전에 스님과 그 문제를 상의했다. 만봉스님은 예운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시왕초(十王草) 등 불화와 자신이 그린 불화를 내주면서 잘 보관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만봉스님이 받은 훈장증

ⓒ 이상기

최 관장은 이런 스님의 뜻에 감복해 불화박물관을 지을 원을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봉원사에 불화박물관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아 박물관 고을 영월에 박물관을 세우기로 한다. 이때 경제적인 지원을 한 사람이 (주)신원휄트의 이용국 회장이다. 2007년 9월 영월군에 박물관 설립계획이 제출되었고, 2008년 3월 박물관 설립이 승인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박물관 기공식을 가졌고, 2013년 3월에 만봉사 법당 부처님 점안식을 거행했다.

2013년 5월 28일에는 대망의 불화박물관이 완성되어 개관을 하게 되었다. 1만2000평의 대지 위에 자리 잡은 만봉사와 만봉불화박물관은 건평이 600평이나 되는 2층 짜리 대형 건축물이다. 6개의 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불화체험실과 시연실, 수장고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박물관에는 만봉스님의 불화 140여 점, 불화의 밑그림인 초 40여 점, 만봉스님의 유품, 제자들이 그린 불화 등 235점의 유물이 전시 또는 보관되고 있다.

불화전시실에서 만난 종교예술의 세계

관음도

ⓒ 이상기

불화전시실은 모두 6개다. 이들 개개 전시실에 적게는 30점, 많게는 50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만봉스님의 작품 중 가장 많은 것이 관세음보살도다. 그것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이 스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시실에서 내가 만난 첫 불화도 관음도(觀音圖)다.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꽃과 나무가 풍성한 연못 위 금강보석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다.

< 화엄경 > 입법계품에 따르면, 관음보살은 남쪽 바닷가 보타락가산에 주석하며 중생을 제도한다.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방문해 지혜를 구하자 그에게 설법한다. 이러한 관음보살은 6가지로 나눠진다. 성관음이 본신이고, 천수관음, 마두관음, 십일면관음, 준제관음, 여의륜관음이 변화신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화에서 자주 보는 것은 수월(水月)관음, 양류(楊柳)관음, 백의(白衣)관음이다. 수월관음은 물에 비친 달을 쳐다본다. 양류관음은 손에 버들가지를 쥐고 있다. 백의관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을 입고 있다.

지장탱화

ⓒ 이상기

내가 다음으로 보게 된 것은 지장탱화와 산신탱화다. 지장탱화는 1995년에 그린 그림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있다. 그리고 앞과 옆에는 시왕, 판관, 사자 등이 시립하고 있다. 산신탱화는 1982년 그린 것으로 백발의 신선과 4명의 동자가 보인다.

나는 이제 다음 전시실에서 만봉스님 영정과 그가 받은 훈장을 본다. 만봉스님은 회색 가사에 붉은 장삼을 두르고 의자에 앉아 있다. 오른손에는 주장자를 들고 있다. 훈장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은관문화훈장이다. 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이치호(李致虎)가 국민문화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만봉 스님의 속가 이름이 이치호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범자문 비단 등 스님의 유품이 여럿 있다.

금칠한 나한도

ⓒ 이상기

다음으로 나한도를 볼 수 있다. 16나한을 2쪽 병풍에 나눠 그렸다. 하나는 금칠을 했다. 6쪽 병풍 두 개에 12지신상을 그린 12지신도도 있다. 12지신은 약사여래의 12대원을 성취하기 위한 호법신(護法神)이다. 그리고 8폭으로 그린 신선도도 인상적이다. 또 다른 전시실에는 만봉스님이 그리고 석주(昔珠)스님이 글씨를 쓴 달마도와 오유지족도(吾唯知足圖)가 있다. 여기서 오유지족은 '나는 정말 현세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이들보다 나의 눈을 사로잡은 그림이 두 개 더 있다. 하나는 1998년에 그린 허준 초상화고 다른 하나는 1999년에 그린 석가모니 삼존괘불화다. 허준은 조선시대 < 동의보감 > 을 지은 한의사다. 그는 왼손에는 약함을 오른손에는 약초를 들고 있다. 스님이 어떻게 해서 허준 초상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제자들 사이에 전해오는 산삼 에피소드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석가삼존괘불탱

ⓒ 이상기

마지막으로 나는 석가삼존 괘불탱을 올려다본다. 이 탱화는 가로가 3.5m, 세로가 6m인 대작이다.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을 봉안했다. 삼존불 앞에는 가섭과 아난으로 보이는 두 제자가 두 손을 합장하고 있고, 그 아래로 문수동자와 보현동자가 길을 인도하는 듯하다. 이 괘불탱은 불화박물관 기공식에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불화가 너무 커, 아래 부분이 굽은 채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천정을 뚫을 수도 없고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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